글 _ 강남거사
찔레꽃 향기가 슬픈 까닭
 
쏜살같다더니 참 세월 빠르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하마 끝이 있으려나 안달하며 봄을 기다렸더니, 고양이인양 살포시 왔다 가는 봄바람에 취하기 무섭게 어느새 주명(朱明)이라니…! 노루꼬리만 하던 낮에도 참새 혓바닥만 한 새순을 연록(軟綠)의 푸르름으로 키워내 연하디연한 자연의 살 내음을 풍기더니, 벌써 쥐어짜면 금세라도 시퍼런 물이 뚝뚝 들을 듯하다. 봄이 가는 게 그리 서럽더니만 이젠 눈이 시원한 녹음(綠陰)이 좋다. 자연이 사람을 공깃돌 다루듯 한다.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768~824)는 ‘올해도 버드나무 우거진 거리에 버들개지 날리는데(柳巷還飛絮)/ 봄은 얼마나 남았는가(春餘幾許時)’ 하고 봄이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송나라 문인 왕안석(王安石·1019~1086)은 만화방창(萬化方暢)한 화려한 봄보다 외려 녹음(綠陰)이 우거진 여름이 낫다고 했다. 그 유명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다! 이 멋진 구절은 만고에 쩌렁쩌렁 운율을 전한다. 뜻풀이보다는 한문이 훨씬 운치 있다. 오죽했으면 우리단가에 제목 비슷하게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까? 아무렴 어떠랴! 봄은 봄이어서 좋고, 여름은 또 여름대로 좋다.

자연은 시절을 향기로 말하고, 고사(高士)는 문향(聞香)하는 법. 암향(暗香)으로 봄 새벽을 알리는 매화로 시작해 한겨울 북풍한설의 살을 에는 매운 냄새까지, 사시장철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눈비는 또 그 나름대로 야릇한 향기를 띄운다. 산야가 보내는 페로몬이다.
요즘 산에 가면 묘하게 진한 향기가 숲을 온통 절인다. 그 진원은 바로 찔레꽃이다. 아카시꽃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밭머리에 퉁그러지듯 버림받은 돌무지나 산비냥서덜 끝자락에 멋대로 엉킨 채 소복하니 무리 지어 핀 찔레꽃. 사는 곳이 외진 탓에 사람이 그리워서인가. 향기로라도 부르려는 듯 바람기라곤 전혀 없음에도 지나는 이마다 고개를 돌리게 해 붙잡는 품이 눈물겹다.

찔레꽃의 한자 이름은 ‘야장미(野薔薇)’다. 찔레꽃은 곱지만 화려하진 않다. 그래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화초’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다. 찔레에서 나온 장미가 ‘꽃의 여왕’으로 대접받는 걸 생각하면 짠할 정도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때문에 대다수 민초(民草)들에겐 더 정겨운 대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민초들한테는 완상(玩賞)이란 사치일 뿐일 테니 그저 일하러 오가다 풀숲광에 수더분하게 핀 꽃을 보며 지친 맘을 달랬을 터다. 더구나 그건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니고, 반(半)품이라도 들여 가꾼 것도 아닌데 한껏 위로를 주는 존재이기에 더욱 고맙고 정겨웠을 테고. 그렇기에 찔레꽃은 유별난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친숙한 존재요, ‘고향’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꽃 가운데서도 특히 찔레꽃이 우리네 가슴에 유난스러운 것은 단지 향기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하던 아픈 추억의 공유이기도 한 때문이다. 찔레꽃이 피는 바로 이때가 태산(泰山·지금 같으면 에베레스트산!)보다 넘기 힘든 맥령기(麥嶺期), 즉 ‘보릿고개’였으니까.

그 시절엔 대부분 남의 소작을 부치거나, 혹 제 땅이라도 고작 메뚜기 마빡만 한 땅뙈기이다 보니 이것저것 떼고 나면 늘 양식이 부족해 이때쯤엔 바닥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보리가 날 때까지 연명하며 버텨내기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아주 오래전엔 이 고개를 미처 넘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제법 됐다(멀리 갈 것도 없이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인 고립과 자연재해로 인해 대기근(大饑饉)을 겪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한에서 수십만 명이 먹지 못해 죽었다! 북한 외무성은 아사자가 22만 명이라고 발표했으나 황장엽은 30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찔레꽃이 필 때면 안타깝게도 늘 가뭄(*옛날엔 가뭄을 초목을 태워버리는 독룡(毒龍), 즉 강철(強鐵)의 출현으로 여겼다!)이 들어 ‘찔레꽃가뭄은 꿔다 해도 한다’는 속담마저 있을 정도로 고통을 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찔레꽃 자체가 배고픔의 고통을 예고하는 메신저나 매한가지였다. 이 고통은 밤꽃이 필 때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찔레꽃이 피면 꿈에라도 사돈 보기가 무섭고, 또 그러니 무남독녀를 건넛마을에 시집보낸 영감조차 차마 갈 엄두를 못 내고 혼이 나간 듯 멍하니 딸네를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인 신동엽(申東曄·1930~1969)이 ‘배가 고파서 연인 없는 봄’에서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이라고 읊고, 가객 장사익(張思翼)이 목이 터지도록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를 외쳐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고 나면 마을마다 여기 저기 새 무덤이 생기곤 했다. 특히 엄마 젖이 말라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어린 것들이 묻힌 애총은 왜 그다지도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먹먹하기만 하다.

사실 그 시절엔 별의별 것을 다 먹었다. 달래·냉이·씀바귀·쑥·민들레·엉겅퀴·취·명아주·비름·머위·소리쟁이·삽주·으아리·둥굴레·닭의장풀·혼잎·뽕잎 등 나물은 물론 청미래덩굴·칡·무릇·나리 등의 뿌리에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松肌)·느릅나무 껍질 등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가 주식(?)이다시피 했으니까. 그것도 양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싸라기라도 한 움큼 생길라치면 가마솥에다 물을 넉넉히 잡은 뒤 이것저것 때려넣고 끓여내 멀국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통적인 구황(救荒)식물이 초목을 합쳐 851가지나 되고, 그중에서 요즘도 평소 시골에서 식용하는 것만 304가지나 된다고 하니 웬만한 식물은 죄다 먹었던 셈이다.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단오 전이면 식물의 순은 다 먹어도 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이같이 나물은 평소엔 반찬이었고, 비상시에는 반(半)양식이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 나물을 잘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식물 중에서 독이 없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나물의 이름과 모양새를 일일이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나물의 모양이나 특성을 콕 집어 만든 ‘나물타령’이 생겨났다. 그래서 ‘99가지 나물 노래를 부를 줄 알면 3년 가뭄도 끄떡없다’는 속담마저 생겼다.
예전엔 아홉 살이 될 때까지 33가지의 나물은 아는 게 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타령 대신 동요 ‘나물 노래’를 불렀다.


꼬불꼬불 고사리 / 이산저산 넘나물
가자가자 갓나무 / 오자오자 옻나무
말랑말랑 말냉이 / 잡아뜯어 꽃다지
배가아파 배나무 / 따끔따끔 가시나무
바귀바귀 씀바귀 / 매끈매끈 기름나물


어디 나물뿐이랴! 심지어 그릇을 만드는 ‘동이찰흙(田丹土)’이나 흰 찰흙(白土)으로 옹심이를 만들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고, 수수와 옥수수의 깜부기까지 먹었다. 그러니 애들은 산이야 들이야 쏘다니며 찔레며 싱아며 삘기며 메 싹은 물론 진달레꽃·아카시꽃·칡꽃 등 먹을 만한 것이면 닥치는 대로 먹어댔다. 미꾸리·돌고기·가재·불거지·쉬리·버들치·모래무지·메기·둑중개 등 물고기도 그렇고, 뱀·개구리·땅벌애벌레·굼벵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영양식(?)이었다.

모진 게 목숨이라 죽을 둥 살 둥 하면서도 겨우 ‘보릿동’을 대면 햇보리가 나는데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보리누름이 오기 무섭게 풋바심을 해 먹을 수밖에 없던 게 이땅 민초들의 가엽고도 눈물겨운 초상(肖像)이었다. 예전엔 꿈에라도 한 번 쇠고기 국에 이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게 원(願)이었던 사람들이 이 땅에 득실거렸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이 같은 얘기를 해주면 “아무리 그랬겠냐?”고 콧방귀를 뀌지만 이따금 소위 ‘먹방’이란 걸 볼 때면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 붉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해당 기고는 강남라이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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