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동덕여자대학교 명예교수·칼럼니스트)

송명견 (동덕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칼럼니스트)

16세기 유럽에서 중국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도자기, 차, 비단 등에 열광하며 중국을 대단한 문명국이라 생각했다. 특히 값비싼 중국 도자기를 소유하는 것은 소장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유함을 자랑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그 무렵 유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도 수준 높은 도자기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도공들을 수백 명이나 일본으로 끌고 갔다. 그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Ceramic War)’이라고도 하는 이유다. 1600년대 전반 명나라가 무너지며 중국 도자기 수입이 어려워지자 유럽에서는 일본의 도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다. 일본이 은과 함께 유럽에 수출한 고급 도자기는 바로 잡혀간 조선 도공들의 혼이 맥을 이은 작품들이었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은 대륙 침탈을 목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놀라는 유럽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예술 분야까지 일본풍(日本風: Japonism)을 넓혀가면서 모네(Monet) 같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위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이 일본을 살려준다. 전쟁 특수와 일본식 노동 윤리, 교육열 등을 업고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삼류 취급을 받던 제품을 일류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서슴없이 외국의 기술을 배워왔고, 그렇게 수입해 발전시킨 기술을 수출했던 나라에서 다시 배워 가게 하기도 했다. ‘동양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근면과 단결을 무기로 1988년에는 소련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우리는 뒤늦게 그 일본의 등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달려왔다. 그럼에도 근래 들어서는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낭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SK하이닉스 등은 그야말로 우리의 자부심이었다. 그 반도체의 핵심 소재와 부품을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일본 정부가 지금 ‘일본식 몽니’를 부리기 시작했다.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이 승리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 분야에서 트집을 잡고 까탈을 부리고 있다. 야비하다. 일제의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놓고, 한국의 대법원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최종 판결을 내렸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나서서 그걸 뒤집으라는 어거지 요구에서 비롯됐다. 명색이 삼권분립을 지킨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을 지키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 대고 이런 악담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빼앗길 뻔했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빼앗길 뻔했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사진 제공 : 간송미술문화재단)

일본 정부는 ‘수출 제한’이라는 무리수를 덜컥 두어놓고, 명분을 제대로 찾지 못해 허겁지겁하는 행태도 보였다. 수출 금지 핵심 소재를 그동안 한국이 몰래 빼돌려 북한에 수출했다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고위관리가 사실처럼 공언하기까지 했다. 이른바 ‘전략물자 북한 수출’ 이야기다. 그건 ‘개탄스럽게도’ 한국의 한 신문이 엮어낸 가짜 뉴스였다. 그걸 일본 신문이 받아서 대서특필한 해프닝이었다. 한국은 전략물자를 북한에 수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일본이 그런 물자들을 몰래 북한으로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을 하면서 들었던 한반도기 오른쪽 부분에 점 하나를 찍지 못하게 했다. 독도를 표시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IOC의 이 같은 조치는 ‘일본 돈의 힘’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게 일본의 ‘실력’이라 했다. 일본과의 오랜 악연과 일본의 용서할 수 없는 만행으로, 우리는 대를 이은 미움을 쌓아놓고 있다.

다 알다시피 일본은 그동안 나쁜 짓을 참 많이도 저질러왔다. 멀쩡한 남의 나라를 침략해 학살과 수탈을 일삼으며 그 나라 사람들 가슴에 못질을 해댔다. 산 사람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생체 실험이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고도 사후에 진심을 담아 반성하거나 사죄한 적도 별로 없다. ‘독도’ 관련 문제처럼 억지 변명 논리 개발에 몰두해왔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나치의 만행에 대해 이 나라 저 나라에 용서를 빌고 있다. 세계 사람들은 그래서 자주 독일과 일본을 비교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일본의 선생이었다. 그들보다 우수했다. 그러나 어쩌다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하나 따지고 보면 그건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는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자포니즘이 있었다면 코레아니즘이 일어날 만큼 우리도 세계에 강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BTS, K-POP, 김연아, 손흥민,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세계 골프계를 흔드는 한국 낭자 군단도 있다. 패션에서도 한국의 디자인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국 할매들의 패션이 명품 브랜드(발렌시아가, 구찌 등)의 디자인 소스가 되는가 하면, 지방시는 지난 5월 2020 봄/여름 남성패션쇼를 ‘서울 길거리 젊은이들의 패션 이미지’로 채웠다. 우리가 글로벌 패션 시대를 열고 있다는 소리다.

결론적으로, 일본산 맥주나 옷가지 불매운동 정도는 정답이 아니다. 눈을 부릅떠야 한다. 지니고 있는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야 한다. 이를 악물고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게 일본을 진짜로 미워하는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당 기고는 강남라이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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