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광평대군파 19대 종손 이규명씨

“이곳은 서울 근교에 남아 있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고들 해요.
세장기비 등은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드넓은 신록의 대지 위에 군락을 이룬 아름드리 소나무, 세월의 풍파에서도 품격을 지킨 문인석(文人石), 장명등(長明燈)이 조화를 이룬 광평대군 묘역은 이곳에 잠든 주인뿐만 아니라 방문객에게도 ‘안식’을 선사한다. 이곳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가부부인 신씨의 묘를 비롯해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 등 700여 기의 묘소가 있다. 광평대군의 19대 종손 이규명(73세) 씨는 묘역 입구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매일 새벽 묘역을 살피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새벽 선조들의 문집과 공신 교지등을 읽고, 채비를 마친 뒤 묘역을 살피러 나옵니다. 제가 종손이 된 것은 네 살부터 입니다. 조부님과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어른들 등에 업혀 와 사당에서 분향도하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당에서는 광평대군, 무안대군, 영순군 삼선조의 제향을 모십니다. 저기 사당 안에 모셔진 불천위(不遷位) 위패가 보이죠?”

↑광평대군 이여의 묘표에 남은 모진 풍파의
흔적을 살피는 이규명씨

제사는 4대 조상을 대상으로 한다. 곧 4대를 넘기면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나라에 큰 공적이 있거나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경 우 4대봉사와 상관없이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그것이 불천위의 영예이다.

600년을 지켜온
600년의 마음들

“광평대군 할아버지께서는 총명하신 분이었지만 1444년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셨지요. 세종대왕께서는 아드님인 광평대군의 목소리를 좋아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하실 때 광평대군에게 소리를 내보게 하셨다는 기록이 전해지죠. 내년이면 광평대군께서 탄생하신 지 600주년입니다.”

긴 세월 묘역이 이어져 온 데에는 후손들의 정성이 있었다. 부장품을 노린 도굴꾼, 전투기 연료였던 송진을 수탈하며 많은 소나무를 훼손한 일제, 포탄의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까지. 묘역을 지켜온 선조들의 지극한 정성을 알기에 이규명 씨는 늘 종손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광평대군파종회 부이사장 이성표 씨는 그런 이규명 씨를 “참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했다. 어느 여름엔가는 새벽마다 묘소를 살피느라 온몸에 풀독이 올랐는데도 별일 아니란 듯 본분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종손으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묻자 이규명 씨는 “종손은 끝없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광평대군 묘역이 시대를 담는 그릇이 되길 바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봄가을엔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곳에서 맘껏 뛰어논 뒤 종회당에서 예절교육도 받습니다. 지역 청소년들에게도 역사교육등을 펼치고 있고요. 강남구민의 휴식처이자 미래 세대의 배움터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