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열정으로 이끈 미용의 세계, 그 넓이와 깊이 송혜자 명장
“ 제가 1994년 이화여대 사회교육원 ‘미용아트과정’을 개설해서 커리큘럼을 직접 짜고 27년간 주임교수로 일했어요. 요즘도 매달 열리는 기술 세미나에 고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제 열정은 10대에 머물러 있죠! 그러니 나이 80이 넘었지만 은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환한 웃음과 당당한 눈빛이 인상적인 송혜자(82세) 명장은 요즘 수채화 그리기와 골프등을 하며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미용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잠잘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국 미용의 대모로 통한다. 꾸준한 연구개발과 실험정신으로 미용을 하나의 학문과 예술적인 위치로 발전시키는 일에 기여해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최하는 2004년 미용부문 ‘올해의 명장’으로 선정됐고 대한미용사회중앙회 이사, 서울시미용사협의회장, 한국미용사회 기술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세계무대에서 한국 미용의 위상을 높인 활약상도 돋보였다. 1993년에는 세계 미용인의 올림픽으로 꼽히는 헤어월드 서울대회를 유치하는 데 앞장섰고 1994년에 이어 1995년 미국IBS(International Beauty Show) 2연패, 1995년 유럽챔피언십 우승 등 지도자로서 국제미용대회를 석권했다.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헤어월드 조직위원과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열정
“1979년 IBS에 첫 출전하면서 국제대회에 대한 경험을 쌓기 시작했죠. 80년대부터는 한국의 미용인들이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매니저를 자처했고요. 대회 내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선수들의 컨디션, 심사과정 등을 살폈어요. 1993년 헤어월드대회 유치를 위해 독일에 갔을 땐 너무 힘들어서 도나우강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처음 길을 내는 이의 심정으로 유치단을 이끌고 갔던 그는 컨디션 난조로 불참한 제자를 위해 선수로 뛰어들어 캐나다를 꺾고 서울대회(1998년)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수도미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도에 미용사자격증을 땄을 때 제가 서울에서 유학하는 동안 후견인이 되어주셨던 작은아버지께서 ‘앞으로 이 자격증이 박사학위보다 더 나을 거야’ 하시면서 기뻐하셨어요. 21살에 미용실을 개업해서 자리잡고, 결혼해서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어요. 넓은 세상에서 더 깊이 아름다움에 대한 영감을 펼치고자 애썼던 건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르신들의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어요. 저도 미용인 후배들에게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창의적인 헤어디자인은 물론, 최초로 머리카락공예도 선보였던 송혜자 명장. 그의 서재에는 표창장과 감사장 등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가장 아끼는 것은 가슴 속에 있다고 한다. 국제대회에서 수상한 후배가 메달을 걸어주며 “이 메달의 주인공은 선생님이에요”라고 고마움을 전했을 때, 빼어난 미용 실력과 감각을 담은 후배들 의 작품을 마주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인생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 보이는 아름다움의 원천은 보이지 않는 열정이죠. 열정으로 꽃피운 아름다움만이 우리 삶을 더욱 넓고 깊게 이끌어주는 원동력입니다.”